2026 해움·새들 입주작가 프로젝트
🌱
정성진 (새들 4기)
Jung Sungjin
회색지대
Gray Zone
2026. 07. 10. - 07. 26.
새들 전시공간
월-금 10:00 - 16:00
토,일 휴관
처음 고양시에 터를 잡은 때가 1993년 겨울이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 분산 정책에 따라 1기 신도시가 조성되었고, 우리 가족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도시에 정착했다. 듬성듬성 심어진 잔디와 이제 막 이식되어 앙상한 모양의 나무들, 그리드로 구획된 빈 대지 위 끊임없이 오고 가는 레미콘 차량은 무에서 도시가 생성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는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질서였다. 대칭과 반복, 균형을 기반으로 계획된 공간은 외관상으로 서로 닮았으며, 신도시 안에서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전에 와본 듯한 기시감을 줄 정도였다. 이는 개별 장소의 기억보다는 도시를 구성하는 구조와 기능이 반복되며 만들어진 감각이었을 것이다.
신도시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낸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의 구조와 풍경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신도시 특유의 감각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대학 시절에는 회화로 옮기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이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가 말한 비장소(Non-place)의 개념과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장소는 공항이나 쇼핑몰, 고속도로와 같이 이동과 기능을 중심으로 설계된 공간을 의미하며, 개인의 역사나 관계,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공간을 가리킨다. 효율과 통제를 위해 설계된 신도시 속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관계를 형성하기보단 주어진 기능에 따라 이동하고 개인은 익명의 존재로만 머무르게 된다.
이번 새들 레지던시에서는 비장소를 중심으로 고양시 곳곳을 답사했다. 카메라를 들고 새들을 거점으로 삼아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반복적으로 탐색하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990년대 도시를 만들며 계획된 비장소들은 30여 년이 흐른 지금 더 이상 순수한 비장소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활이 축적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공간이 사용되며, 장소와 비장소의 성격이 중첩된 모호한 상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통로인 공간이 다른 이에게는 익숙한 일상의 장소가 되고, 반대로 가장 사적인 공간마저 비장소처럼 경험되기도 한다. 프로젝트의 제목인 ⟪회색지대⟫는 바로 이러한 경계의 모호함에서 출발한다.
단채널 영상으로 제작된 <회색지대>는 이러한 답사의 과정을 기록한 작업이다. 작품은 도시를 답사하며 발견한 공간을 기록하며, 그 구조적 형태를 전체 맥락에서 분리해 하나의 조형적 대상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상 속 건축 모형처럼 보여지는 이미지는 실제 공간을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며, 전시장 바닥에는 동일한 대상을 1/50로 축소한 3D 프린트 조형물이 함께 설치된다. 주변 환경이 제거되어 섬처럼 놓인 구조물들은 기능을 수행하던 도시 인프라가 아니라 반복과 리듬, 비례와 스케일이 만들어 내는 순수한 조형 형태로 관객 앞에 드러난다.
이번 답사에서 발견한 회색지대의 특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대곡역 고가 하부와 같이 도시 구조 속에서 발견되는 반복적 리듬과 익명성이다. 이러한 공간은 기능을 위한 구조물이면서 반복적으로 나열된 기둥과 보, 과도하게 비어있는 텅빈 공간, 인간의 스케일을 벗어난 구조를 통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조형성을 드러낸다. 다른 하나는 유승 아파트 복합 상가와 같이 시간이 흐르며 생활의 흔적이 침투한 공간이다. 처음에는 균질한 소비 공간으로 계획되었지만, 사람들의 점유와 적치, 관리의 흔적이 축적되며 계획된 기능과 실제 사용이 충돌하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변화했다. 두 유형은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지만, 모두 장소와 비장소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회색지대에 속한다.
여러 대의 LCD 패널로 구성된 <Subconscious Telemetry Feed>는 고양시 도심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무빙 이미지로 송출하는 장치이다. 작품은 도시 곳곳에 설치된 통신탑의 구조와 기능을 차용한다. 실제 통신탑이 이미 존재하는 신호를 수집하고 증폭해 전달하는 장치라면, 작업은 신호가 형성되고 의미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와 불확실성에서 주목한다.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는 완전한 풍경이 아니라 비어있고 손상된 채 불완전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기억과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경험은 시간이 흐를수록 일부가 소실되고 왜곡되며, 다시 떠올릴 땐 손상된 조각들이 임시로 이어 붙여진 불완전한 이미지로 재구성된다.
<Maze>는 집에 대한 개인적 감각을 키네틱 설치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고양시에서 여러 차례 이사를 반복하며 경험한 아파트는 가장 사적인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익명성과 반복성이 강하게 작동하는 장소였다. 동일한 평면이 수없이 반복되는 집단 주거 구조 속에서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와 냄새, 벽 너머에 존재하는 타인의 기척, 창문 너머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시선은 집을 안식의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방향을 잃게 만드는 미로처럼 느끼게 했다. 가장 개인적인 장소라고 여겨지는 집조차 획일적인 구조와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비장소적 감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Maze>는 이러한 역설을 통해 장소와 비장소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서로 스며들며 공존하는 상태임을 드러내고 있다.
고양시 일대를 답사하며 장소와 비장소를 구분하는 기준이 흔들리는 순간을 매번 마주했다. 계획된 기능은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의 기억과 생활로 덧씌워지며, 가장 사적인 공간은 때로 집단 주거의 익명성과 반복성 속에서 낯선 비장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도시는 장소와 비장소라는 두 개의 범주로 설명되기보단 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수많은 회색지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리서치 프로젝트는 이러한 경계의 풍경을 기록하고 익숙한 도시를 다시 응시하게 만든다. 작품은 어떤 답을 제시하는 대신 스스로 보고 사유하며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어 나만의 질문을 해 볼 것을 제안한다.
글: 정성진 (새들 4기 입주 작가)
2026 HAEUM SAEDEUL Artist Project